옹정제(雍正帝)의 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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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0-2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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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와 같이 정력적인 노력가에게나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몽고(蒙古), 만주(滿洲) 같은 북방민족의 군주는 유력자의 집회에서 선거
되어야 할 것이니 바꿔 말하면 군주는 1대에 한한 것이었다. 옹정제는 이 실패를 목격했으므로 자신도 태자를 세우지
않고 이른바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란 것을 고안했다. 세조(世祖)
때에 와서 점차 china(중국) 식의 천자가 되었지만 그런데도 사후의 유조(遺詔)에
의하여 강희제를 지명했던 것이다. 군주독재의 근세에 들어간 china(중국) 에서도 이만큼
전형적인 독재군주는 달리 없었다.
이 문서는 다시금 천자에게 반납되지만 이 주비유지가 붙은 문서가 궁중에
산적되어 낭하에까지 쌓였다고 한다. 그리고 임종시에 옹정제를 후사(後嗣)로
지명했던 것이다. 청조 특유의 china(중국) 지배체제는 옹정제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좋다. 완전히 china(중국) 식이 된 것은 강희제
때였으니, 그는 아직 ★Þ을 때에 적장자를 황태자로 책립했다. <-(주)
china(중국) 군주의 특권 중에는 후계자 지명권이 포함된다된다. 청조에서도
태종(太宗)까지는 후계자를 예정해 두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황태자의 불초함을 이용해 장래의 투기에 큰 뜻을 둔조신(朝臣)들이
황태자에게 아첨하여 당파를 만들고 마침내는 부황(父皇)을 시역(弑逆)하려
하는 음모까지 발전했으므로 강희제는 황태자를 폐한 채로 마침내 태자를
세우는 권리행사를 체념해 버렸다. 그것은 후사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상자에 넣고 궁중의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고 쓴 액자
뒤에 숨겨 두고 만일 천자가 지명을 하지 않고 죽은 경우에는 대신들이
입회한 가운데 상자를 열어…(省略)
순서
친전서(親展書)(친히 펴보는 사신(私信))를 교환하고 지방의 실상을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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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雍正帝)의 내치
다. 그는 밤늦게까지 홀로 이 태접(泰摺)을 열람하고
거기에 주필(朱筆)로 답신, 주비유지(주批諭旨)를 기입하여 돌려 보냈다.
옹정제(雍正帝)는 또 지방 고관과의 사이에 공문서 이외에 사(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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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雍正帝)는 또 지방 고관과의 사이에 공문서 이외에 사(私)적인 친전서(親展書)(친히 펴보는 사신(私信))를 교환하고 지방의 실상을 숨... , 옹정제(雍正帝)의 내치인문사회레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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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雍正帝)는 또 지방 고관과의 사이에 공문서 이외에 사(私)적인
친전서(親展書)(친히 펴보는 사신(私信))를 교환하고 지방의 실상을 숨기지
말고 보고하게 했다.